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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24일 백중4재-지장보살님 영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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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백중 4재일 입니다. 지난 주 예고한 대로 지장보살님의 영험한 이야기를 해 볼까 합니다.

 

1.도솔산으로 보내 달라는 지장보살상.

 

도솔산으로 보내달라영험 보인 금동지장보살좌상

선운사 지장보살상.png

 

 

선운사금동지장보살좌상, 조선 초기, 높이 83cm.


전라북도 고창군 아산면 선운사로 250번지 선운사에 있는 조선 초기의 금동지장보살좌상은 1963121일에 보물 제279호로 지정되었다(사진 1). 원래 관음전에 봉안되어 있었던 것을 2014년 지장보궁전(地藏寶宮殿)이 완성되면서 그곳으로 옮겨 모시고 있다. 선운사 금동지장보살좌상은 일제강점기에 도난당하였다가 2년 만에 다시 돌아온 것이다. 당시 도난과정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고 사찰에서 전하는 기록에만 간략하게 적혀 있다.

보물 279호 금동지장보살좌상
일제강점기 절도범에 도난
일본으로 팔려간 후 소장가들
꿈에 나타나 보내달라호소

외면하던 소장가들 병이 들고
집안 우환 끊임없이 반복되자
고창경찰서 연락해 이운 부탁
2년 만에 고창 선운사로 귀환

1936년 여름 어느 날 문화재 절도범은 일본인 2명과 함께 공모하여 금동지장보살상을 훔쳤다. 그 뒤 거금을 받고 불상을 일본으로 팔아넘겼다. 그런데 일본으로 건너간 후 지장보살상의 영험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 불상을 불법으로 구입한 소장가의 꿈에 수시로 지장보살상이 나타나서 나는 본래 전라도 고창 도솔산에 있었으니 어서 그곳으로 돌려 보내달라고 하는 것이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였으나 이후 병이 들고 집안이 점점 기울게 되자 지장보살상을 다른 사람에게 팔았다. 그러나 다른 소장자 역시 꿈에 지장보살이 끊임없이 등장하고 집안에 우환이 끊이지 않았다. 그 후에도 지장보살상은 몇 차례에 걸쳐 옮겨 다녔으나 매번 같은 현상이 나타났다. 이러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어쩔 수 없이 고창경찰서에 연락하여 모셔갈 것을 부탁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선운사 스님들과 경찰들은 193811월에 일본 히로시마로 건너가서 지장보살상을 다시 모셔오게 되었다. 그때 찍은 기념사진이 남아 있으며 사진 뒷면에는 불상 반환과 관련된 내용이 간략하게 적혀 있다(사진 2).

지장보살이란 지옥에서 고통 받고 있는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서 영원히 부처가 되지 않겠다고 서약한 보살을 말한다. 석존이 열반한 후 미륵불이 세상에 나올 때까지 육도(六道)를 윤회하면서 고통 받고 있는 중생들을 한 사람도 남김없이 구제하겠다는 보살이다. 인도에서는 크게 신앙되지 않았으나 우리나라와 중국, 일본 등 동아시아에서는 죽은 후 지옥의 고통에서 구해주는 것으로 믿어 일반 대중들에게 깊은 신앙을 받았다. 우리나라의 경우, ‘삼국유사4 ‘진표전간(眞表傳簡)’조에 의해 신라 경덕왕 때 진표율사로부터 지장보살이 신앙되기 시작하여 고려시대에서 조선 초기에 걸쳐 크게 유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선운사 지장보살상 반환사진.png

 

 

 

선운사금동지장보살좌상 반환 사진과 뒷면 설명문. 선운사 제공.


지장시륜경(地藏十輪經)’지장보살본원경(地藏菩薩本願經)’에 따르면 지장보살은 이미 여래의 경지에 이르렀고 무생법인(無生法印)을 얻었다고 한다. 그 형상은 삭발한 스님의 모습으로 왼손에 보주를 들고 오른손은 시무외인(施無畏印)을 하고 있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머리에 두건을 쓰고 손에 보주와 석장(錫杖)을 지닌 승려의 모습으로도 표현되었다.


선운사 금동지장보살좌상은 종교적인 영험 때문인지 신라나 고려 불상과는 다른 불심이 엿보인다. 높이 1m 정도의 아담한 크기에 단독상으로 모셔져 있다. 단독상일 경우에는 좌우에 지하세계를 주재하는 시왕(十王)을 거느리고 명부전(冥府殿)에 안치되며 삼존불상은 지장보살상 좌우에 도명존자와 무독귀왕이 배치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선운사 지장보살상은 좌우의 협시나 시왕상들이 남아 있지 않고 관음전에 봉안되어 있었다고 하니 전각의 성격과도 맞지 않는다.

전반적으로 상체가 크고 두 다리가 빈약하여 신체 비례가 자연스럽지 않. 머리에는 두건을 쓴 전형적인 지장보살의 모습인데 두건을 묶은 좁은 띠가 이마를 감싼 후 양쪽 귀를 덮으면서 가슴 아래까지 길게 내려와 있다. 어깨 위를 덮고 있는 두건은 머리 뒤쪽에서 매듭으로 묶였으며 그 아래로 층단을 이루는 주름이 표현되었다. 두건을 쓴 지장보살상은 중국 당대에 번역된 지장시륜경에서 유래되었으나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그 예를 찾아볼 수 없고 서역과 우리나라에만 나타나는 특이한 형식이다.


얼굴은 넓적하면서 턱이 이중으로 처리되었으며 이목구비는 작고 가운데로 몰려 있어 살찐 모습이다. 몸에는 양쪽 어깨를 덮은 통견의 법의를 걸쳤는데 왼쪽 가슴부분에 가사를 묶은 띠매듭과 사각형의 장신구가 표현된 것이 특이하다. 결가부좌한 두 다리는 옷으로 덮여 있고 그 위로 옷주름이 한쪽 방향으로 쏠리듯이 일률적으로 표현되었다. 드러난 가슴 위로는 수평으로 입은 내의와 내의를 묶은 띠매듭이 보이며 세 줄로 내려온 목걸이가 장식되었다. 이러한 착의법과 장신구는 고려 후기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불, 보살상에 나타나는 전형적인 특징이다. 또한 오른손은 위, 왼손은 아래에 두고 엄지와 넷째손가락을 살짝 구부리고 있다. 손의 위치나 오른손에 손금이 새겨져 있는 점 등은 같은 경내에 있는 고려 후기의 도솔암 금동지장보살상과 매우 유사하다(사진 3). 지장보살상의 지물은 석장과 보주가 일반적이지만 도솔암 지장보살상의 경우는 손에 법륜(法輪)를 쥐고 있다. 선운사 지장보궁전의 금동지장보살상 역시 왼쪽 손바닥 위에 남아 있는 지물의 흔적으로 보아 법륜을 쥐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법륜은 불교의 진리를 상징하는 것으로 중생을 번뇌와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공덕을 가진 보주와 거의 같은 상징성이 있다.

 

 

도솔암 지장보살상.png  선운사도솔암금동지장보살좌상, 고려 후기, 높이 97.5cm.

 

 


선운사란 이름은 사찰이 위치한 곳인 선운산에서 유래된 것이다. ‘선운사사적기에 의하면 선운(禪雲)’이란 구름 속에 누워 참선하고 도를 닦는다는 것을 뜻한다. 선운사가 언제 창건되었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조선 숙종대인 1713년에 기록된 대참사사적기(大懺寺事蹟記)’에 의해 신라 진흥왕 때 검단선사가 대참사(大懺寺), 중애사(重愛寺)와 함께 세운 사찰이라 전한다. 또한 도솔산선운사창수승적기(兜率山禪雲寺倉修勝蹟記)’에는 선운사는 1470(성종 원년) 행호선사에 의해 대대적인 중창 불사가 있었으나 1592년 임진왜란 때 어실(御室)만 남고 모두 소실되었으며 1608년에서 1609년에 걸쳐 사찰이 중건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후로 중수와 중건을 거듭하면서 점차 사세가 번창하여 선운산의 대표적인 사찰이 되었고, 지금에 이르러 많은 전각과 부속암자를 거느리게 되었다.

선운사에는 지장보궁전의 금동지장보살상 외에 도솔암 도솔천내원궁 금동지장보살상(보물 제280), 참당암 약사전 석조지장보살상(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33)이 전해지고 있다. 이와 같이 선운사 경내에 고려 후기에서 조선 초기에 이르는 3구의 단독 지장보살상이 모셔져 있다는 사실은 예부터 이 지역이 지장보살의 도량으로 지장보살 신앙이 널리 유행하였음을 말해준다.

이숙희 문화재청 문화재감정위원 shlee1423@naver.com 

 

2. 철원 심원사 화주시주 상봉

 

심원사는 유서 깊은 절이었다. 신라 진덕여왕 원년(647)에 영원(靈源)조사가 영주산(보개산의 처음 이름)에 영원, 법화, 도리, 흥림사를 차례로 개창해 우렁찬 산문을 열었다. 그 가운데 흥림사가 세월의 바람에도 자취를 잃지 않고 심원사로 이름을 바꾸며 맥을 이어왔다. 영주산이 보개산으로, 흥림사가 심원사로 이름을 바꾼 것은 범일 국사의 중창(신라 헌안왕 3859)에 이어 무학대사가 삼창(三創 조선 태조51396))을 한 뒤 부터였다.

 

그렇듯 누대의 스승들이 거듭 고쳐 지으며 사격(寺格) 뿐 아니라 수행의 가풍도 훌륭히 세워 온 심원사가 다시 낙후해 새로이 불사를 하려 했으나 빈한한 산지의 절을 고쳐 짓는데는 만만치 않은 재원이 필요했다. 그래서 선뜻 불사를 시작하기가 난감했음에도 묘선은 젊은 기개와 신심을 바탕으로 불사를 발원했던 것이다.

꿈이 좋으니 모든 일이 잘 될 것 같구나.”

이른 아침 묘선은 바랑을 메고 산길을 내려 왔다.

처음 만나는 사람이라. 어떤 사람이 큰 시주가 되어 불사를 도우려나

 

간밤의 꿈, 부처님의 가피를 믿기에 자못 궁금한 것은 처음 만날 그 사람의 정체였다. 굽이굽이 산길을 걸어 마을이 가까와 진 곳에서 묘선은 한 사람을 만났다.

아니 저 사람은?”

지게를 지고 오는 한 사나이. 무엇이 즐거운 듯 작대기로 지게 목발을 두드리며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사내는 분명 절 아래 마을에서 머슴살이를 하는 사람이었다. 묘선은 가난한 떠돌이 머슴이 불사에 시주를 할 수 있을까라는 의심이 들었다. 그래서 저 사람은 아닌가 보다란 생각을 하며 지나칠까 했지만 그래도 예사롭지 않은 꿈이 생각났다.

아침 일찍 어디 가십니까?”

, 심원사 스님이시군요. 나무하러 갑니다.”

잠시 드릴 말씀이 있는데

 

사람좋게 웃어 보이는 머슴의 얼굴을 바라보며 묘선이 심원사 중창불사와 자신의 백일기도 그리고 지난밤 꿈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이야기를 마치도록 조용히 듣고만 있던 머슴의 입에서는 아주 뜻밖의 말이 터져 나왔다.

 

스님. 감사합니다. 50평생을 이리저리 떠돌이 머슴으로 살아 온 제가 그런 엄청난 일에 힘을 보탤 수 있다니 저는 믿어지지 않습니다. 스님의 꿈은 분명 부처님께서 저를 점지하신 것일 겁니다. 저는 평생 박복한 신세를 한탄만 했으나 이제 그렇지 않습니다. 장가도 못간 홀 몸이 사는데는 하루 일거리와 먹거리가 필요할 뿐 아무것도 원하는 것이 없습니다. 어쩌면 좋은 일에 쓸 수도 있을 것 같은 생각에 그간 아무도 몰래 모아 둔 재물이 좀 있습니다. 그걸 다 시주하겠습니다.”

 

기쁜 마음을 내며 시주를 흔쾌히 허락한 머슴 앞에서 묘선을 할 말을 잃어야 했다.

나무관세음보살. 시주에 사람을 분별한 내가 어리석었구나. 인연은 사람의 귀천에 있지 않음을 내가 왜 잊었던고. 나무관세음보살.”

머슴이 낸 돈은 불사를 하기에 턱없이 부족한 것이었지만 떠돌이 머슴의 주머니에서 나왔다고 믿기에는 많은 그런 재물이었다. 그것을 기틀로 일단 불사를 시작하기에는 모자람이 없었다. 곧바로 불사가 시작됐고 묘선은 인근 마을은 물론 먼 곳으로까지 화주를 다녔다.

 

그런데 아주 안타까운 소식을 들었다. 머슴이 병 들었다는 것이다. 의원들도 고칠 자신이 없는, 아니 무슨 병인지조차 진단이 되지 않는 병이라 했다. 그저 기운을 못 차리고 시름시름 시들어가는 병이었다. 떠돌이 머슴이 몸에 병이 들고나니 사람들이 거두어 주려 하지 않았다. 거기에 심원사에서 재물을 빼앗아가서 화병이 든 것이다는 소문까지 돌게 되었다. 묘선은 머슴을 절로 데려와 간병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극진한 묘선의 기도와 간호에도 불구하고 뿌리 끊어진 묘목처럼 야위어 가던 머슴은 끝내 운명을 달리하고 말았다.

 

, 내 잘못이다. 불사에 대한 지나친 욕심이 빚어낸 허황된 꿈을 믿고 저토록 순박한 머슴의 재물로 불사를 하고 있는 내가 어리석고 어리석음이로다. 시주의 은혜를 죽음으로 갚아야 하는 것을 보니 이것은 분명 잘못된 일이다. 머슴이여. 이 어리석은 사람을 용서하시라

 

머슴의 죽음을 맞아 고통에 헤매이던 묘선은 법당에 들어갔다. “부처님 왜 그런 허황된 꿈을 보여 주셨습니까. 저는 이제 사람을 죽인 몸이나 다름없습니다. 살인자에게 무슨 불심이 있고 자비심이 있겠습니까혼자 울부짖던 묘선은 자신도 무르게 부처님의 이마에 도끼를 꽂았다. 그리고 심원사를 떠나 버렸다. 묘선은 이 고을 저 산천을 누비는 걸승이 되어 떠돌았다.

 

그런 일이 있고 난 뒤 사람들의 뇌리에서는 심원사의 일이 차츰 잊어졌고 불사도 그대로 중단되었다. 이마에 도끼가 꽂힌 부처님의 모습이 흉했다. 사람들이 도끼를 빼려해도 절대 빠지지 않는 이적이 사람들의 입을 따라 전해지고 있을 뿐이었다.

 

강산이 세번 바뀌었다. 고을에는 젊은 사또가 부임 해 왔고 매사에 혈기 충천한 사또도 심원사의 부처님 이마에 꽂힌 도끼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렇다면 본관이 그 도끼를 뽑아보리라.”

사또는 날을 택해 심원사로 향했다. 그때 전국을 떠돌던 묘선도 부처님 이마에 도끼를 꽂은 일이 늘 마음에 걸려 심원사를 향했다.

 

황폐된 절에 사또가 행차한 날 사람들이 우르르 절로 모여든 것은 당연했다. 그 사람들 틈에는 걸승이 한 명 있었다. 묘선이었다.

 

법당에 들어선 사또는 정성껏 3배를 올렸다. 그리고 팔에 잔뜩 힘을 주고 도끼를 뽑으려 했다. 사람들은 깊은 침묵 속에서 사또의 행동을 살피고 있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가. 사또는 별 힘을 들이지않고 30여년을 꼼짝 않던 도끼를 쑥 뽑아 버리는 것이 아닌가. 놀라는 사람들 틈에서 누구보다 놀란 것은 바로 걸승 묘선이었다. 그러나 더욱 놀라운 일은 뽑아진 도끼에 새겨진 글자였다.

 

화주 시주 상봉.”

이 여섯 글자가 또렷이 도끼날에 새겨져 있었던 것이다. 그제서야 사람들 앞으로 나선 묘선은 감격의 울음을 섞은 목소리로 그간의 일들을 사또와 사람들에게 설명했다.

이는 필시 부처님의 가피입니다. 사또는 바로 30년전 병들어 죽은 머슴의 후신입니다

 

그로부터 다시 사또의 지원을 받으며 심원사의 불사가 시작됐다.